13살 무렵 집에 CD를 재생하는 전축이 생겼다. 어머니가 친구들로부터 선물 받은 것이었는데, CD를 재생하는 기기의 부분이 분리가 되어 휴대용으로도 사용할 수 있었다. 이어폰을 처음 사용한 것도 아마 그 즈음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나의 음악에 대한 관심이 커지기 시작했을 때라, 한 달에 한 번, 용돈 대신 CD 한 장을 선물 받고 있었다. 그래서 학교에 갈 때나 학원에 갈 때, 그 날 들을 CD 한 두 장을 유심히 골라 전축에서 분리한 CD플레이어와 함께 가지고 다니면서 들었다. 충격에도 예민하고 CD를 가지고 다녀야만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이어폰을 통해 들리는 음악이 내가 걷는 거리, 내가 있는 공간을 전혀 다른 곳으로 바꾸어주는 것은 참으로 매력적인 일이었다. 초등학생의 용돈으로 구할 수 있는 이어폰은 그다지 많지 않았을 터, 당시 그 CD플레이어에 어떤 이어폰을 썼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어머니께서 아이리버사의 MP3를 선물해주셨다. MP3는 혁신이었다! 원하는 노래를 골라 넣어 나만의 재생목록을 만들 수도 있었고 CD플레이어보다 작고 가벼웠다. 좀더 좋은 음질을 찾아 여러 이어폰을 시도해보았던 시기도 그때였다. 일반적인 플라스틱 형태의 이어폰, 고무 캡이 달린 이어폰, 해드셋처럼 음악이 나오는 부분이 보통의 것에 비해 큰 이어폰. 그 중에서도 나와 잘 맞아 지금까지도 쓰고 있는 것은 고무 캡이 달린 칼국수 형태의 이어폰이다. 칼국수 형태의 선을 선호하는 것은 단순히 그것이 보통의 선에 비해 엉킨 것이 잘 풀린 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음악이 직접 나오는 이어폰의 머리(?)부분은 매우 중요한데, 고무 캡 형식의 이어폰은 고무 캡이 귓구멍 안으로 직접 들어가니 외부의 소리가 어느 정도 차단되어 다른 이어폰과 비교하였을 때 음량을 적게 해도 소리가 잘 들리는 편이다. 단점이라면 고무 캡을 잃어버리면 들을 수가 없다는 것. 주머니에서 넣었다 빼거나 엉킨 이어폰을 거칠게 푸는 과정에서 고무 캡이 떨어지곤 해서 외출 중에 잃어버린 사실을 발견하면 절망할 수 밖에 없다.
이제는 MP3의 시대도 지나 스마트폰에서도 직접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되면서 집이 아닌 공공장소에서도 이어폰만 있으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지하철에서도 버스에서도, 공원에서도 거리에서도, 이어폰만 있으면 대중 속에 있더라도 나만의 세계로 들어가기가 훨씬 쉬워진다. 그래서 현대인에게 이어폰은 생활 필수품이 되었다. 나 역시 외출할 때면 항상 이어폰을 귀에 꽂으며 집을 나선다.
삶의 어떤 시기는 음악으로 기억된다. 나에게 의미 있는 시기에 자주 들었던 음악이라면 오랜 시간이 지나더라도 그 음악을 들으면 그때의 정서와 분위기가 고스란히 떠오른다. 나는 고등학교를 타지의 기숙학교로 다녔는데 당시 입학한 학교에 아는 친구가 단 한 명도 없어서, 입학 초기에 많이 우울했던 기억이 있다. 성격도 그리 외향적이지 못해 이대로 친구를 사귀지 못하게 되나 하는 걱정도 들었다. 그 시기에 자주 들었던 것이 셀린 디온의 신반 ‘TAKING CHANCES’였는데, 굉장히 좋은 노래들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잘 듣지 않는다. 혼자 기숙사 침대에서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듣던 우울한 기분이 다시 떠오르기 때문이다. 반면 노라 존스의 ‘FEELS LIKE HOME’은 친구를 만나러 가는 일요일, 종로를 지나는 버스에서 듣던 순간을 떠올리게 하며 스위트피의 ‘하늘에 피는 꽃’은 겨울날 홀로 걷던 눈 오는 서울을 생각나게 한다.
거리에서 이어폰으로 노래를 듣는 일이 물론 기억하는 일에 있어서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OUT OF NOISE’는 사카모토의 앨범들 중에서도 굉장히 실험적인 느낌이 강하다. 그래서 집에서 가만히 듣고 있으면 기분이 묘해져 듣기가 힘든데 공공장소에서 이어폰으로 그 음반을 듣다 보면 평소에 떠오르지 않던 생각들이 떠오른다. 물론 그러한 생각들이 노래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으며 단지 그 분위기와 내가 있는 공간 사이의 간극으로 인해 드는 생각들인 듯하다. 이어폰이 없었다면 공공장소에서 나만을 위한 음악을 듣기란 거의 불가능했을 것. 이어폰이 있기에 우리는 삶의 시기들을 조금 더 풍성하게 기억할 수 있으며, 일상적인 공간에서의 경험을 특별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이어폰을 사용하다 보면 귀가 아파오는 때가 있다. 기본적으로 외부의 소음이 있기 때문에 음량을 집에서 듣는 것보다 크게 조절하다 보니 그렇다. 그럴 때, 이어폰을 빼고 주변의 소리들을 듣게 되면 우리 주변에 이렇게나 많은 소리들이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지하철과 선로의 마찰음, 거리의 바람에 가로수의 잎사귀가 흔들리는 소리, 자동차 바퀴가 빗물을 지치며 나는 소리, 요란스러운 참새가 지저귀는 소리.
장자의 제물론에서는 이러한 소리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남곽자기는 장자가 이야기에서 설정한 가상의 인물로 오랜 수행을 마무리한 뒤, 이제 막 깊은 명상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마른 나무처럼 아무런 의식이나 생명활동이 없는 것처럼 보여 그 모습을 본 제자 안성자유가 어떻게 하면 그처럼 깊은 명상에 빠져들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일 수 있는지 묻는다. 그러자 남곽자기는 이처럼 대답한다. ‘자유야, 참으로 훌륭한 질문이구나. 지금 나는 나를 잊었다. 너는 알겠느냐? 너는 ‘인간의 음악’은 들어보았겠지만 ‘땅의 음악’은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설사 땅의 음악을 들어본 적이 있다 한들 아직 ‘하늘의 음악’은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서 남곽자기가 말하는 인간의 음악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음악을 말한다. 속세에 묻혀 사는 사람들은 오로지 인간의 음악만이 음악이라고 알지만 사실 세상은 수많은 소리들로 가득하다. 그러한 대표적인 것이 바로 남곽자기가 이야기한 땅의 음악이다. 땅의 음악은 인간이 의도적으로 내는 소리가 아니라, 환경에서 사물과 사물이 서로 반응하면서 나는 소리다. 장자는 도를 더 터득하게 되어 진인이 되면 모든 소리의 근원이 되는 형체가 없는 소리가 아닌 소리, ‘하늘의 소리’까지 들을 수 있게 된다고 이야기하지만 여기서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땅의 음악’이다. 땅의 음악은 바람소리, 물소리처럼 대부분 작고 사소한 것들로 항상 우리들 곁에 있지만 우리의 귀에 꽂혀진 이어폰은 그러한 사소한 것들로부터 우리를 단절시킨다.
이어폰은 집에서, 공연장에서 듣던 음악을 온전히 우리의 일상으로까지 확장시켰다. 그래서 공공장소에서도 온전히 나만의 공간에 빠질 수 있게 도와주는 존재로 누군가의 소중한 추억의 한 편에 있기도 하며 새로운 생각을 하게 하는 매개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이어폰이 우리에게 좋은 것만 가져다 주었을까. 우리가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거리를 걸으면서 주위의 사소하지만 아름다운 ‘땅의 음악’에 점점 무관심해지고 있는 것을 아닐지. 그리고 더 나아가 이어폰을 귀에 꽂은 우리들의 모습이 내 주변의 세상에 무덤덤해져 가는 오늘날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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