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네가 오는 주말(2021.3)

이 글은 생명안전공원이 건립되고 20여년이 지난 뒤, 화랑유원지를 방문한 한 사람의 시점으로

4.16생명안전공원 국제설계공모 참여자가 쓴 자전적 소설이다.




제방을 따라 걷다보면 남쪽으로 숲이 보였다. 그 숲의 나무들은 공원의 다른 나무들보다도 유달리 키가 컸고 멀리서 보아도 눈에 띄었다. 저수지를 향해 선 커다란 나무들의 무리. 그것은 몇 년 전 가을에 처음 이 곳을 방문한 뒤로도, 종종 너의 마음 속에 떠오르던 장면이었다.


벚꽃 피었네, 라고 너는 생각했다. 4월 16일을 앞둔 주말이었고 멀리 보이는 그 숲 사이로 노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것이 언뜻 보였다. 이 공원의 이름이 생명안전공원이었던가. 


그 일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너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경주로 수학여행을 가는 날이었고 한 손에 핸드폰을 쥔 채 과자봉지를 뜯던 버스 맨 뒷자리의 아이들에게서 처음 그 배의 이름을 들었다. 그 애들은 우리도 세월호처럼 다 죽는거 아니냐고 떠들었고 얼굴을 굳힌 선생님은 그런 말은 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궁금해진 너는 무심히 검색창에 ‘세월호’라고 검색하였고 ‘참사’라는 단어의 뜻과 단원고에 대해, 250명이라는 숫자에 대해 알게되었다. 흔들리는 버스가 어쩐지 무서워진 너는 핸드폰 화면을 껐다. 그러고선 옆자리에 앉은 아이에게 경주에 가면 우리 뭐부터 보러가냐고 괜히 물어보았다.


2년 전 가을, 너는 K미술관에서 열리는 한 건축가의 회고전을 보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화랑유원지를 찾은 적이 있다. 전시를 보고나서 유원지를 산책할 겸 제방길을 따라 걷던 너와 친구들은 어느새 노란 나뭇잎이 바닥을 가득 메운 숲 속을 걷게 되었다. 낙엽을 보며 이 나무, 이름이 뭐였지? 하고 친구들과 의논하다 고개를 든 너는 나무들 사이로 반짝이는 빛무리를 보았다. 오후의 햇살에 황금빛으로 물든 그 빛무리 속에서 어린 아이들 몇 명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 여기 그게 있었지, 라고 너는 중얼거렸다.


그날 너는 친구들과 함께 숲 너머에 있는 전시관에 갔었다. 그러나 그 학생들이 있다는 봉안당에까지는 가지 못했다.




봄날의 튤립나무 숲은 가을보다 조용하지만 4월이 되면 조금씩 소란스러워진다. 튤립나무는 4월 중순에 개엽하고 5월이 되면 새들만 겨우 볼 수 있는 높은 가지 위에 튤립처럼 생긴 크고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라고 학교에서 배웠던 것을 너는 기억했다. 이 숲의 튤립나무들도 겨울 동안 소중히 간직해온 올해의 첫 잎을 내보이고 있었다. 나무 가지마다 열린 작고 여린 연두빛 잎들이 옅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 너는 4.16민주시민교육원에 있는 기억교실에 갔었다. 그 중 한 교실 뒤편에 붙여진 게시판에서 너가 졸업한 경기도 S대학의 조경학과를 지망했던 학생의 이름을 발견했다. 그 때 너는 네 안의 어딘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너는 그 떨림이 무엇이었는지 알기 위해 이 곳을 찾아야만 했다. 



숲을 지난 너는 들판 한 가운데에 점점이 모인 석판들과 그 사이에서 반짝이는 유리창들을 보았다. 너는 석판들의 둘레를 천천히  걸으며 너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이 거대한 슬픔의 크기를 가늠해보았다. 그리고 더 천천한 걸음으로 경사진 길을 따라 아래로 아래로, 깊이 걸어내려갔다. 


어둠 속에 사람들의 형상이 보였고 작은 빛들이 사람들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이 곳에 닿는 250개의 빛점들은 지상에서 시작되어 봉안당을 통해 들어온다고 들었다. 이 빛점들 중 하나는 분명 그 학생을 지나왔을 것이다. 작은 빛점이 흩어져 마치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너도 모르게 눈을 감은 너는 너무 깊은 어둠에 놀라 다시 눈을 떴다. 너의 손과 너의 발과 너의 머리를 어루만지는 그 빛 아래에서 너는 오랫동안 웅크려 앉아있었다.  


이제 곧 바깥에서는 4.16추모전야제가 열릴 것이다. 너는 이 곳에 오기전 노란 옷을 입은 한 사람에게서 받은 작은 등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너는 불을 켰다. 두 손으로 감싸쥔 그 작은 불빛을 가슴 언저리에 가져다 댄 너는 그 곳에 있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위로 위로, 올라갔다. 가슴에 돌이라도 매단 것처럼 무거웠다. 어두운 나선의 길을 따라 올라오는, 일렁이는 빛점들의 무리*. 


지상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저 멀리 네가 걸어온 제방길을 따라 너가 가진 것과 비슷한 불빛을 쥔 채 줄을 지어 걸어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들판 위에서 너가 보았던 석판 사이의 유리창에서 하나씩 하나씩 빛이 켜지기 시작하였고, 이내 304개의 빛 기둥이 공원을 밝혔다. 

...


*

신철규의 시 ‘바벨’에서 참조



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글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서윤후 외. (2019). 교실의 시. 돌베개

신철규. (2017).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주)문학동네

한강. (2014). 소년이 온다. (주)창비

황정은 외. (2014). 눈먼자들의 국가. (주)문학동네

Comments


bottom of page